하노이 국립 사범대학교 어학당에 다니던 시절 얘기다. 어학당 다닌 지 6개월 남짓 됐을 때였다.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러 베트남어 ABC 시험을 보라고 했다. 시험을 보고 베트남어학과에 정식으로 들어가라고. 너 정도 열정이랑 성실함이면 졸업도 문제없다고.

6개월 배운 학생한테 대학 졸업 얘기라니. 선생님이 나를 너무 좋게 봤거나 학과에 학생이 모자랐거나 둘 중 하나였을 거다. 어느 쪽이든 그날 이후 내 책상에는 베트남어 ABC 문제집이 올라왔다. 베트남어 ABC 시험은 베트남 대학에 가려는 외국인이라면 꼭 치러야 하는 시험이다. 특히 이름 있는 국립대에 들어가려면 최소 B2는 받아야 한다.
하루에 네 과목·등급은 여섯 단계
베트남어 ABC 시험은 베트남 대학들이 외국인을 상대로 여는 베트남어 능력 시험이다.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네 과목을 하루에 다 본다. 이름이 ABC라서 등급도 세 개겠거니 하면 오산이다. A1부터 C2까지 여섯 단계다.

등급마다 시험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다 같은 시험을 보고, 네 과목 평균으로 등급이 갈린다. 똔득탕대학교 규정을 보면 한 과목이라도 0점이면 평균이 아무리 높아도 불합격이다. 자신 있는 과목 하나 믿고 버티는 전략은 안 통한다는 얘기다.
베트남어 ABC 시험 기본 구성

베트남어 ABC 시험 네 과목은 하루에 모두 치른다. 똔득탕대학교 공개 샘플 기준으로 듣기·읽기·쓰기는 과목마다 60분, 말하기는 한 사람당 15분 안팎이다.
듣기는 55문제다. 짧은 대답 고르기로 시작해 긴 대화와 강연까지 이어지고, 음성은 딱 한 번만 나온다. 읽기는 지문 5개에 40문제로, 일상 이야기부터 인문·과학 글까지 폭이 넓다. 쓰기는 받아쓰기, 편지나 이메일 답장, 의견 에세이로 구성된다. 말하기는 자기소개와 일상 대화, 선택하고 이유 말하기, 주제 발표와 꼬리 질문까지 세 단계로 진행되는데, 이 부분은 아래에서 따로 자세히 다룬다.
5월에 권유받고 7월에 본 베트남어 ABC 시험

선생님 말을 들은 게 5월, 베트남어 ABC 시험은 7월이었다. B2를 노리기엔 두 달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평일엔 아침 9시까지 어학당에 가서 12시까지 독해, 듣기, 말하기 수업을 들었다. 문제는 쓰기였다. 어학당엔 쓰기 수업이 없었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 나면 베트남 친구를 붙잡고 저녁 7~8시까지 쓰기와 말하기를 했다. 눈 떠서 잠들 때까지 베트남어만 읽고 듣고 쓰고 말한 두 달이었다.
결과는 B2였다. 그것도 턱걸이로.
베트남어 ABC, B2 성적 하나로 달라지는 것
베트남어 ABC 시험 하나 본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묻는다면, 꽤 많은 게 달라진다고 답하겠다. 우선 전공생에게는 졸업 요건이다. 한국이든 베트남이든 베트남어 전공생이라면 ABC 시험을 피해 가기는 어렵다. 한국에 있는 외국어대학교들의 베트남어과는 졸업 기준이 B2~C1 정도고, 현지 대학 중에도 C1 이상을 요구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회사에서도 내 언어 실력을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베트남은 외국어 실력을 유럽연합 공통 기준(CEFR)인 A1~C2로 나누는 데 익숙하다. B2, C1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인지 다들 안다. 베트남 회사에서 베트남어 ABC B2나 C1이 있다고 하면 베트남어 실력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승진이나 이직 때도 쓸모가 있다.

또한 현지 대학 입학의 첫 관문이다. 외국인 전형으로 베트남 대학에 들어가려면 학교는 ABC 시험 성적부터 본다. 필요한 등급과 인정 기간은 학교마다 제각각이다. 호치민 인문사회과학대학교는 작년 입학 기준으로 A2 이상을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B2라는 등급 하나가 내 베트남어 실력 전체를 증명해 준다. 다른 베트남어 시험은 말하기만 보거나 듣기와 읽기만 보는 경우가 많지만, 베트남어 ABC 시험 등급은 듣기·읽기·쓰기·말하기, 즉 네 과목을 모두 거쳐 받은 결과다. 그만큼 내 실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줄 수 있고, 베트남 교육 당국이 인정하는 시험이라 공신력도 있다.
종이에서 컴퓨터로, 달라진 시험 방식
코로나를 지나면서 베트남어 ABC 시험도 꽤 달라졌다. 종이 시험지 대신 컴퓨터를 꺼낸 대학이 늘었고, 정해진 날에만 열던 시험을 수시로 여는 곳도 생겼다. 2027년에 우리가 볼 ABC는 또 어떤 얼굴일까.
독해와 듣기는 이제 여러 대학에서 컴퓨터로 치를 수 있게 바뀌었다. 지문에 밑줄 긋고 여백에 메모하던 습관은 이제 내려놔야 한다는 뜻이다. 대신 문제를 빨리 풀 수 있고, 점수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물론 점수를 나중에 알려주는 대학도 아직 많다.

쓰기는 아직 손으로 쓰는 곳이 많다. 베트남어 자판이 낯선 응시생을 배려한 면도 있고, 바꾸고 싶어도 쉽게 못 바꾸는 사정도 있다. 하지만 최근 조금씩 쓰기, 말하기까지 네 과목을 전부 컴퓨터로 보는 학교가 조금씩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 호치민 똔득탕 대학교에서는 4과목 모두 컴퓨터로 시험을 치루고 있다. 앞으로는 내가 시험 볼 학교에서 종이로 시험을 보는지, 컴퓨터로 시험을 보는지 미리 확인하고 시험 준비를 해야할 것이다.
문을 여는 순간 시작되는 말하기
말하기 시험은 아직 많은 학교가 예전 방식 그대로 대면으로 진행한다. 방에 들어가면 평가관 두세 명이 앉아 있다. 시험은 문을 여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말하기 시험은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된다. 첫 단계는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름, 나이, 직업, 베트남에 온 지 얼마나 됐는지 묻고 음식이나 취미 같은 일상 얘기가 이어진다. 그다음엔 선택지 두세 개 중 하나를 고르고 이유를 대야 한다. 여행 갈 때 버스를 탈지 기차를 탈지 같은 질문이다. 마지막은 주제 하나를 놓고 내 의견과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말한 뒤 평가관의 꼬리 질문을 받는 단계다. 예를 들어 ‘Tiền bạc có thể mua hạnh phúc không?’(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나요?) 같은 질문이 나온다.
🙇 ABC 말하기 시험, 인사도 점수
- 들어갈 때: Em chào thầy cô ạ. (선생님, 안녕하세요.)
- 끝날 때: Em cảm ơn thầy cô ạ. (감사합니다.)
- 말이 꼬였을 때: Xin lỗi cô, em nói lại được không ạ? (죄송해요, 선생님. 다시 말해도 될까요?)
이 시험에선 태도도 점수다. 들어가면 ‘Em chào thầy, cô ạ.’로 인사하고, 끝나면 ‘Em cảm ơn thầy cô ạ.’로 마무리한다. 3초 넘게 말이 끊겨도 감점될 수 있으며, 말이 꼬였다면 ‘Xin lỗi cô, em nói lại được không ạ?’라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말하기 시험을 이어 가야 한다. 평가관도 사람이다. 웃는 얼굴과 예의 바른 태도가 생각보다 많은 걸 바꾼다.
베트남어 ABC, 어렵지만 한 번은 거쳐야 할 시험
네 과목을 모두 봐야 하는 ABC는 만만한 시험이 아니다. 나도 두 달 동안 베트남어 공부에만 매달린 끝에 겨우 B2를 받았다. 그런데 그 두 달 동안 얻은 건 성적표에 찍힌 등급보다 컸다. 단순히 말이 좀 는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아니었다. 어느 과목이 약하고 무엇을 더 공부해야 하는지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보였다.

그래서 베트남어 ABC 시험은 무작정 문제집부터 펼쳐 드는 시험이 아니다. 지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준비해야 같은 시간을 투자해도 결과가 달라진다. 베트남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든, 베트남 회사에서 내 실력을 증명하고 싶든, 아니면 지금 내 베트남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든, 베트남어 ABC는 한 번 도전해 볼 만한 시험이다.
